서울의 봄, 전화벨이 울릴수록 움직이지 못한 사람들

처음 《서울의 봄》을 봤을 때는 전두광의 얼굴만 따라갔습니다. 사람을 몰아붙일 때마다 커지는 목소리, 상대가 물러서는 순간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 이미 판을 장악했다는 듯한 걸음이 너무 강했거든요. 다시 보니 이상하게 전화기 쪽으로 시선이 갔습니다. 누군가는 전화를 걸어 부대를 움직였고, 누군가는 명령을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죠. 총보다 먼저 사람을 묶어둔 것은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과 수화기 너머의 망설임이었습니다. … 더 읽기

기생충의 계단은 누구에게도 같은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반지하 창문 앞에서 술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던 장면은 처음 볼 때 불편한 농담처럼 지나갔습니다. 기우와 기정은 익숙하다는 듯 창밖을 바라보고, 기택은 와이파이 신호가 잡히는 자리를 찾죠. 다시 《기생충》을 보니 그 작은 창문이 자꾸 마음에 걸렸어요. 바깥을 볼 수는 있지만 사람들의 발목과 거리의 먼지가 먼저 들어오는 높이. 김 가족이 세상을 바라보는 위치가 이미 그 안에 담겨 … 더 읽기

극한직업에서 치킨 냄새가 사건보다 먼저 퍼진 이유

치킨 냄새가 골목을 채우기 시작한 뒤부터 마약반 형사들의 얼굴이 조금씩 편안해졌습니다. 범인을 잡으려고 맞은편 건물을 지켜볼 때보다 주문이 밀린 주방 안에서 훨씬 살아 있어 보였죠. 처음 《극한직업》을 봤을 때는 이 엉뚱한 상황이 그저 웃겼습니다. 다시 떠올려보니 웃음 한가운데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의 피로가 꽤 오래 눌러앉아 있었어요. 고반장과 장형사, 마형사, 영호, 재훈은 경찰이지만 어디에서도 … 더 읽기

택시운전사, 만섭의 백미러에 광주가 들어온 순간

광주에 들어가기 전까지 만섭에게 중요한 것은 약속된 돈과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었습니다. 외국인 손님이 왜 그곳에 가려는지, 도로가 왜 막혔는지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처럼 넘겼어요. 처음 《택시운전사》를 봤을 때는 그런 태도가 조금 얄밉게 느껴졌습니다. 이번에는 생각이 달랐어요. 어린 딸을 혼자 키우고 밀린 월세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거창한 정의보다 당장 받아야 할 요금에 가까웠겠죠. 그래서 만섭이 특별한 신념 … 더 읽기

검사외전, 강동원의 능청보다 감옥 안 황정민의 기다림이 더 답답했습니다

《검사외전》은 제 기억 속에서 늘 강동원이 선거 유세장에서 춤추던 가벼운 영화 쪽에 놓여 있었습니다. 황정민이 감옥에서 복수를 설계한다는 줄거리보다, 한치원이 넥타이를 고쳐 매고 검사인 척 문을 통과하는 장면이 먼저 떠올랐죠. 그래서 다시 볼 때도 웃기는 부분부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가벼움 뒤에서 거의 움직일 수 없는 변재욱의 시간이 이상하게 자꾸 걸렸어요. 처음에는 그 가벼움이 영화의 … 더 읽기

7번방의 선물, 눈물보다 용구의 억울함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노란색 세일러문 가방이 화면에 보일 때마다 마음이 먼저 불편해졌어요. 처음 《7번방의 선물》을 봤을 때는 그 가방이 용구와 예승을 이어주는 귀여운 소품처럼 느껴졌죠. 이번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갖고 싶어 하는 딸에게 사주고 싶었던 물건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시작점처럼 보였어요. 예전 기억 속의 《7번방의 선물》은 많이 울었던 영화에 가까웠습니다. 7번방 식구들이 예승을 몰래 … 더 읽기

휴민트, 사람을 정보로 부르는 순간이 더 불편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밤은 눈보다 먼저 검은색으로 기억됐습니다. 가로등이 닿지 않는 골목과 북한 식당 아리랑의 붉은 조명, 창문에 비친 사람들의 얼굴이 한 화면 안에서 자꾸 갈라졌죠. 처음 《휴민트》를 봤을 때는 조 과장과 박건이 언제 총을 겨눌지 따라가느라 바빴습니다. 다시 보니 총구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진짜 목적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거리였어요. 인물의 얼굴은 … 더 읽기

시민덕희, 사기를 당한 사람이 왜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할까요

사기를 당한 사람은 왜 피해 사실을 말하면서 먼저 고개를 숙이게 될까요. 《시민덕희》를 다시 보면서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질문입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세탁공장 직원이 중국의 보이스피싱 조직을 쫓아간다는 전개가 통쾌하게 다가왔죠. 그런데 실화에서 출발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보니, 총책을 잡는 과정보다 덕희가 자신이 속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이 더 아프게 들어오더군요. 《시민덕희》는 2016년 경기도 … 더 읽기

올드보이, 복수보다 기억에서 도망치는 사람이 더 무서웠습니다

올드보이를 처음 봤을 때 가장 오래 남은 건 장도리도, 복도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비밀이 드러난 뒤 오대수의 얼굴이 아주 잠깐 무너지는 순간이었죠. 너무 강한 장면들이 연달아 나오다 보니 그때는 충격만 따라가느라 인물의 표정을 살필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재생한 이번에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그 얼굴에서 눈을 떼기가 쉽지 않았어요. 초반부를 다시 돌려 … 더 읽기

부산행의 닫힌 문마다 석우의 선택이 달라졌습니다

석우는 열차 문이 닫힐 때마다 먼저 자기 딸이 안쪽에 있는지 확인합니다. 수안이 무사하면 다른 사람의 사정은 잠시 뒤로 밀려나죠. 처음 《부산행》을 봤을 때는 빠르게 달려드는 감염자와 객실 사이를 오가는 추격이 가장 긴장됐습니다. 다시 떠올리니 이 영화에서 더 자주 반복되는 것은 감염자의 얼굴보다 문을 열어줄지 말지 망설이는 사람들의 표정이었어요. 석우는 펀드매니저로 일하며 성과와 손익을 빠르게 계산하는 …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