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준평은 처음부터 믿을 만한 안내자가 아니었습니다. 감옥에서 자신을 꺼내준 조인창 일행의 지도를 빼돌리고, 필요할 때마다 거짓말을 섞으며 자신만 아는 길을 무기처럼 사용합니다. 처음 《백두산》을 봤을 때는 서울이 무너지는 장면과 거대한 화산 폭발, 남북한을 오가는 작전의 규모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떠올려보니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재난을 막아야 하는 두 남자가 각자 가족에게 돌아갈 방법부터 계산하던 모습이었습니다.
조인창은 전역을 앞둔 폭발물처리반 대위입니다. 곧 아빠가 될 예정이고, 임신한 아내 최지영에게 돌아가는 일만 기다리고 있었죠. 하지만 사고로 지휘관을 잃은 뒤 갑작스럽게 작전의 책임을 떠맡습니다. 반면 북한 공작원 리준평은 이미 조직에서 버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작전에 협조하는 척하면서도 백두산 인근에 있는 딸 순옥을 찾아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한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한 아이에게 돌아가려 하고, 다른 사람은 너무 오래 외면했던 딸에게 뒤늦게라도 닿으려 합니다.

리준평은 사람보다 탈출구를 먼저 봤습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리준평은 붙잡혀 있는 순간에도 상대를 관찰합니다. 누가 겁을 먹었는지, 누가 명령을 따르는지, 차와 무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빠르게 훑어보죠. 웃는 얼굴로 농담을 건네다가도 계산이 끝나면 망설임 없이 움직입니다. 조인창의 지도를 손에 넣고 자기 방식대로 대원들을 끌고 가는 모습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누구도 믿지 않아온 시간이 느껴졌습니다.
하정우가 맡은 조인창은 그런 리준평에게 계속 끌려다닙니다. 전문 전투요원이 아니라 폭발물을 해체해온 군인이기에 총격과 추격 앞에서 당황합니다. 겁이 나면서도 자신보다 어린 대원들을 두고 갈 수 없고, 아내에게 돌아가고 싶으면서도 임무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합니다.
두 사람이 차 안에서 주고받는 말은 재난영화의 긴장을 잠시 풀어줍니다. 리준평은 인창을 놀리고, 인창은 그를 믿지 못해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그런데 농담이 이어질수록 두 사람의 처지가 닮았다는 사실도 드러납니다. 국가가 짠 계획 안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정작 두 사람이 지키고 싶은 것은 거대한 명분보다 자기 가족입니다.
리준평이 딸을 찾아가려는 목적을 숨긴 채 일행을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행동은 쉽게 응원하기 어렵습니다. 그 선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더 큰 위험에 빠지고 작전도 흔들립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족을 돌보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라도 딸에게 가려는 마음에는 절박함과 이기심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영화가 그를 처음부터 희생적인 아버지였던 사람으로 포장하지 않는 점이 좋았습니다.

인창은 영웅이 아니라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최지영은 남편이 북한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무너지는 서울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도로가 갈라지고 건물이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배 속의 아이를 지키며 움직입니다. 인창이 전화기 너머로 아내의 목소리를 확인하는 순간에는 한반도의 운명보다 한 가족의 불안이 먼저 들립니다. 재난이 아무리 커도 한 사람에게 가장 급한 소식은 가까운 사람이 무사한지 여부였습니다.
조인창이 계속 집에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태도는 처음에는 책임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다시 보면 그 말은 겁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의 솔직함에 가깝습니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각오가 아니라 아내와 아이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움직입니다. 후반부에 그가 임무를 끝까지 붙잡는 변화도 영웅적인 선언이라기보다, 자기 가족을 살리려면 다른 사람의 가족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처럼 보였습니다.
마동석이 연기한 강봉래와 전혜진이 맡은 전유경은 현장 밖에서 작전을 밀어붙입니다. 불완전한 가능성이라도 선택해야 하는 두 사람의 긴장은 필요했지만, 과학과 정치, 주변국의 개입까지 한꺼번에 담으면서 몇몇 갈등은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영화가 가장 살아나는 순간은 거대한 회의실보다 인창과 준평이 좁은 차 안에 함께 있을 때입니다. 회색 화산재가 쌓인 거리와 버려진 건물 사이를 지나는 동안 카메라는 두 사람의 얼굴을 자주 붙잡습니다. 바깥에서는 세상이 무너지고 있지만 차 안에서는 딸과 아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이야기가 오갑니다. 거대한 재난과 지극히 사적인 걱정을 나란히 놓는 방식이 이 영화의 감정을 만들었습니다.

리준평은 딸을 만난 뒤 떠날 줄 알게 됐습니다
리준평은 마침내 딸 순옥을 직접 만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부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그는 딸을 알아볼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막상 아이를 마주한 뒤에는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여야 합니다.
처음의 리준평은 작전을 이용해서라도 딸에게 가려고 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순옥을 직접 만나고 자기 손으로 데려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딸을 만난 뒤 그의 목적은 달라집니다. 자신이 딸 곁에 남는 것보다 딸이 살아갈 세상을 남기는 일이 더 중요해집니다.
마지막 탄광으로 향하는 과정에서도 인창과 준평의 관계가 완전한 우정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말투도 다르고 서로를 대하는 방식도 거칩니다. 다만 상대가 무엇을 두고 떠나는지는 이해하게 됩니다. 인창에게는 출산을 앞둔 지영이 있고, 준평에게는 너무 늦게 만난 딸 순옥이 있습니다. 서로의 가족을 알게 된 뒤부터 두 사람은 작전에 투입된 부품이 아니라 돌아갈 사람이 있는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리준평의 마지막 선택은 그가 처음부터 좋은 아버지였다는 증명이 아닙니다. 딸을 돌보지 못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마지막 행동 하나가 모든 잘못을 씻어주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그는 처음으로 딸과 함께 있고 싶은 자기 욕심보다 딸이 살아남는 쪽을 선택합니다. 딸을 직접 만나는 것보다, 만난 딸을 두고 다시 떠나는 일이 그에게는 더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리준평은 순옥을 만난 순간이 아니라 순옥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사라지는 쪽을 선택했을 때 비로소 아버지가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아이 곁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자리를 포기해서라도 아이가 살아갈 시간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백두산》은 재난의 규모와 남북 공조, 핵무기를 이용한 작전까지 많은 요소를 한꺼번에 밀어 넣습니다. 웃음과 가족 이야기, 총격과 과학 설명이 빠르게 바뀌어 감정이 충분히 머물지 못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리준평과 조인창이 서로를 이해하는 속도는 영화의 제한된 시간에 맞춰 다소 서두르는 인상을 줍니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남는 것은 화산의 불길보다 두 남자가 가족을 지키는 방식의 차이였습니다. 인창은 살아서 아내와 아이에게 돌아가야 했고, 준평은 자신이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딸이 살아갈 시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한 사람은 아버지가 될 미래를 향했고, 다른 사람은 너무 늦게 배운 아버지의 책임을 마지막에 감당했습니다.
결말에서 순옥은 조인창의 가족과 함께 살아갑니다. 리준평이 직접 딸 곁에 남지는 못했지만, 그가 마지막에 인창에게 건넨 부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두 남자의 관계도 여기서 완성됩니다. 인창은 준평의 희생으로 자기 가족에게 돌아왔고, 동시에 준평이 돌아가지 못한 자리까지 책임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백두산》을 규모가 큰 재난 오락영화로 기억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큰 폭발은 산이 아니라 리준평이 끝까지 붙잡았던 자기 목적을 놓는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딸과 함께 도망치려 했던 사람이 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모두가 살아남을 방향으로 돌아선 선택. 그가 순옥에게 남긴 것은 함께 쌓을 추억이 아니라, 자신이 없어도 계속될 내일이었습니다.